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중고 컴퓨터

지역 재활용 센터는 가끔 가다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변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처리할 때만 찾지만, 나는 쓸만한 물건이 있나 하고 자주 찾는다. 마침 여름도 되고 해서 선풍기 하나 구할까 하고 왔다가 멀쩡한 컴퓨터가 한대 놓여있는 걸 보게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관리인 아저씨한테 담배 한갑에 곱게 모시고 올 수 있었다. 물론 선풍기는 덤으로 가져왔다.

컴퓨터는 누가 버린 거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깨끗했다. 국내에서 그래도 잘 나가는 대기업에서 제조한 거라 디자인도 좋았다. 하지만 중고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처음 부팅을 시도했을 때 컴퓨터는 특유의 윙 하는 소리만 내고 그대로 멈춰 버렸다. 선풍기와 함께 가져오느라 피곤하기도 해서 다음날 손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조용히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이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잠을 계속 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컴퓨터가 생각났다. 마치 하드디스크가 에러 났을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전원을 그냥 켜두고 잠들었나 하는 생각이 나서 일어났다. 불을 켜고 컴퓨터를 살펴 보았지만 전원 플러그도 빠져 있고 LED에도 불이 들어와 있는 곳은 없었다.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직 새벽 세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고 얼마 후 다시 윙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뭔가 이상해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눈만 가늘게 뜨고 컴퓨터가 있느 쪽을 슬쩍 바라봤다. 그 순간 모니터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 나오며 파랗게 충혈된 두 눈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바로 감전된 듯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컴퓨터를 다시 재활용 센터에 돌려주고는 그 다음부터는 발길을 끊고야 말았다. 그런데 내가 컴퓨터만 가져 왔던가?

팩스

 거의 삼일째 철야(?) 중이다. 전에야 하루 정도 철야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삼일 씩이나 철야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아니! 내 인생 철학에 맞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이제는 이 철야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작은 무역 오퍼상을 하다 보니 직원들이 있을 리 만무하다. 동업을 하던 친구가 힘들다며 취직을 하며 그만두고서는 혼자 모든 일을 해야 했다. 거기다 호주 거래처에 매출 관련 정기보고를 하는 시기이니 일이 넘칠 수 밖에 없었다. 어쨋든 덕분에 이렇게 일이 꼬였다. 삼일째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삼일째가 맞나?

 그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내 눈에 띈 건 철야 첫째날부터였다. 새벽 1시쯤 팩스기에서 수신음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이면 미국에서나 팩스를 보낼텐데?' 라고 생각하며 팩스기 쪽으로 갔다. 번호 표시창의 번호를 확인할려고 했지만 번호는 없고 'I'라는 영문글자만 떠 있었다. '뭐지?' 하며 종이를 받아봤지만 종이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는 것이 없었다. 잘못 들어왔겠지 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한 30분 쯤 일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삐이'하는 팩스 수신 소리에 잠이 깼다. 스크린세이버가 돌아가는 모니터를 깨우고 시간을 보니 2시였다. '또 뭐야?'라는 생각으로 팩스기를 다시 확인하자 이번에는 'AM'이라는 영문이 뜨고 다시 백지를 토해냈다. 누가 도대체 이런 장난을 하나 하고 화를 내다가 깜짝 놀랐다. 번호가 안뜬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RECEIVING' 같은 수신 상태 표시가 뜨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일도 하지 않고 팩스기만 쳐다봤다. 하지만 그렇게 그날 밤은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 다음날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게임 한판을 끝내고 액셀로 다음분기 예상매출을 시뮬레이션 하던 중에 다시 '삐이'하는 수신음이 울리고 팩스기가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흠칫 놀라 모니터의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였다. 혹시나 하며 팩스기의 표시창을 확인했다. 표시창에는 역시 숫자는 없이 'BEHIND'라고 글이 떴다. 나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사무실을 스탠드와 모니터 빛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팩스기가 내뱉은 종이는 역시 그전과 마찬가지로 백지였다. 이번에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일도 못한 채 팩스기만 지켜봤다. 정확히 한 시간 후 팩스기는 다시 수신음을 내며 동작하기 시작했다. 표시창에는 'OF'라는 영문만이 떴다. 그리고는 역시 백지를 내뱉었다. 그걸 보고는 약간 겁이 나서는 그만 사무실을 나와 근처 여관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삼일째에는 사무실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호주 거래처에서 휴대폰으로 계속 재촉을 하는 통에 사무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매출이 좋지 않아 계약 연장이 불투명하니 이런 일이라도 시일 안에 맞춰야만 했다. 낮 동안에 빨리 일을 끝내기로 하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은 어제 새벽 떠날 때 그대로였다. 혹시 해서 팩스기를 살펴 봤지만 그 이후로는 거래처에서 들어온 팩스 말고는 별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밤 11시 쯤 되서 일을 거의 마무리하고 커버레터 작성만이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그 'OF'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짖이지만 궁금증이 동하자 무서움도 사라지는 듯 했다. 그래서 새벽 1시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커버레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다시 '삐이'하는 소리에 팩스기를 보았다. 표시창에 뭐가 뜨나 하고 봤지만 아무 것도 뜨지를 않았다. '뭐야?'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Y'가 표시됐다. 그러면서 팩스기는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뭔가가 인쇄되는지 '드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표시창에는 'Y'자 뒤로 'O'와 'U'가 연이어서 나타났다. 'YOU?' 표시창에는 뚜렷하게 'YOU'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순간 머리 속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I AM BEHIND YOU!' 이번에는 팩스기에 인쇄가 된 종이가 나왔다. 종이에는 종이를 들고 놀라는 내 모습과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는 누군지 모를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겁이 나서 뒤도 돌아보지 못한채 그렇게 밤을 재새우고 끝모를 철야를 하고 있다. 팩스기 앞에서.

잠깐!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글을 쓰고 있지?

그들은 아직 거기 있을까?

가정 형편 덕분에 자라면서 너무 많은 이사를 했다. 그래도 가장 오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있는데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이다. 주변의 대부분 단지들이 재건축을 하고 있는 지금도 튼튼하기만 해 주민들의 원성을 듣고 있는 시영아파트 단지이다. 더 어릴 적 기억은 모르지만 그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유치원을 다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그때를 정점으로 가세가 점점 기울어 그 이후에는 어릴 시절의 낭만(?) 같은 건 이별을 하게 되었기에 더욱 기억나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파트 단지는 당시에는 그래도 꽤 사는 사람들이 살았던 터라 저녁 때에도 상가들은 불을 환히 켜고 있었다. 단지 곳곳에는 가로등이 있어서 어둡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밤이 밤이 아닌 건 아니었다. 가로등에 아파트 그늘이 생기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가끔이라도 저녁이나 밤에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가게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아파트 모서리에서 희끗한 뭔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나는 아파트 모서리마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자세히 보기라도 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나가 그렇게 쫓아다녔던 건지 많은 수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몇달을 그것들과 마주치다 보니 무서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언젠가부터는 그것들이 그 자리에서 지켜주지 않으면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집안의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어린 나에게도 현실적인 문제 외의 많은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것들도 잊혀졌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그것들이 갑자기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아직 거기 있을까?

공명

파랗다 못해 까만 밤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밤에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아름다운 걸 가까이 두고도 사람들은 왜 항상 우중충한 얼굴일까? 아래를 내려다 보자 또다른 의미에서의 까만 것이 눈에 들어온다. 주차장과 아스팔트 도로. 아스팔트 도로는 새로 깔아서인지 유난히 검은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려다 보고 있던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붕 뜨듯이 시야가 급격히 상승했다가 아스팔트를 향해 내리꼿혔다. 그리고 아스팔트에 거의 닿을 무렵 '쿵'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꿈인가 보다. 어머니가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고 하시던데 키가 클려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은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보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렇지만 밤하늘은 이미 꿈에서 본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3일 후 친구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3학년 여자 선배 하나가 3일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하는 발인과는 별도로 하는 학생들이 추모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2학년 대표로 친구와 내가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일 전이면 내가 꿈을 꿨던 날이고 해서 기분이 이상해서 별로 참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임원회 일이고 하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모행사는 선배의 시신이 발견된 아파트 단지 내 도로에서 치룬다고 했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뭔가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아파트 옥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로를 내려 보았다. 그곳은 바로 3일 전 내가 꿈에서 본 그곳이었다. 도로에 표시된 위치로 봤을 때 그 선배가 뛰어내린 곳은 그날 내가 꿈 속에서 떨어졌던 곳과 일치했다. 갑자기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오르자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

그날 꿈 속에서 내가 본 건 뭐였을까? 내가 본 게 맞는 걸까? 혹시 그 선배의 눈을 통해 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선배와 나 사이의 이 동조 현상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지? 나는 살아있는 걸까? 선배는 죽은 게 맞을까?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참고) 이 글은 9년 전에 유니텔에도 한번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때 읽은 분들이 오해 없이 읽으셨으면 합니다.

전자사전

동생이 또 버릇이 도진 모양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같이 밖에서 쓸데없는 물건을 그렇게도 가지고 들어오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멀쩡한 전자사전을 가지고 왔다. 작동은 하지 않았지만 외관은 아주 멀쩡했다. 동생은 아마도 수은전지가 다 되서 그럴거라고 했다. 자기가 습득했을 때는 멀쩡하게 작동을 했는데 사무실 책상 서랍에 한 일년 쳐박아 뒀더니 그런 거라고 했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동생은 손님이 두고 간 걸로 생각하고 찾으러 오면 돌려줄려고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아 가져온 거라고 했다. 동생 말대로 수은건전지를 사다 끼우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마침 전자사전이 필요하던 차라 동생을 구슬러서 내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이것저것 기능을 체크하던 나는 사용자 정보 메뉴까지 체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전 주인이었을 사람의 이름인지 '김인*'이라는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동생한테 보여주면서 연락해 봤냐고 했더니 이미 전화해 봤는데 결번으로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단어도 이것저것 찾아보며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다음날부터 업무가 바빠 전자사전 자체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 호주 거래처에 새 거래처 관련된 인스트럭션을 작성하느라 전자사전을 사용하게 됐다. 물론 인터넷이나 컴퓨터에도 사전 기능이 있지만 아무래도 외부에서 쓰기에는 전자사전이 좋았다. 사무실이 있음에도 무언가 쓰는 작업은 까페에서 더 잘 되는 관계로 이번에도 자주 이용하는 홍차 전문점에서 작업을 했다. 영어 서류 작성이라 한영사전을 이용하여 작업하던 중 실수로 '이지'라고 타이핑을 했다. 사전에는 '이지연'이라는 여자 이름만 뜨고 다른 단어는 뜨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해당 단어를 선택하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떴다.

"이지연[李知緣] 1977년4월20일 생 / 2002년4월21일 실종"

'이건 뭐야?' 하며 전원을 껐다가 다시 키자 이번에는 '이지[理知]'라는 단어부터 그 다음 단어들이 정상적으로 떴다. 잘못 봤나보다 하고 작업을 계속했다. 그렇게 까페에서 작업을 하고 집으로 돌와왔다. 그러나 저녁 9시가 되자 어디선가 알람 소리 비슷한 게 들려서 찾아보니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전자사전에서 나는 소리였다. 뚜껑을 열고 보니 화면에는 "인*씨 어디 있어요?빨리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잘못 본건가 하고 전원을 껐다 켰지만 메시지는 그대로 떠 있었다. 전 주인이 장난쳤나 하고 걸려 있는 알람 설정을 해제하고 책상 서랍에도 쳐박아 두었다. 하지만 그날부터 전자사전은 저녁 9시만 되면 울려댔다. 이제 메시지는 뜨지 않았지만 아무리 알람을 해제해도 그 때 뿐. 다음날이면 어김 없이 알람은 울려대는 것이었다. 이제는 가족들도 귀찮은지 어디다 갖다 버리라고 성화였다. 나도 꺼림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자주 들르는 지역 재활용센터에 전자사전을 가져다 줬다. 관리하는 아저씨는 이런 새 물건을 왜 버리냐고 했지만 그냥 웃음으로 때우며 센터를 나왔다. 나오면서도 머리 속에는 이지연과 김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충전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가끔 창 밖이 환해지는 게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모양이다. 번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내가 번개를 맞으라면 그건 사양하겠다. 니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내 머리는 너무 좋다. 그래서 모든 일들의 결과나 결말이 일을 실행하기도 전에 머리 속에 그려진다. 번개는 그런 정도의 머리가 없다고 해도 당연히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의지를 갖지 못한 에너지 생명체는 그래서 더 무섭다.

그런 무서운 존재와 친척쯤 되는 전기를 마음대로 다루는 인간들은 참 무서운 존재다. 그리고 내 집에도 그 전기가 왔다갔다 움직이기 위해 시시탐탐 틈을 노리는 구멍들이 몇개 있다. 그 돼지코 같이 생긴 형상 덕분에 이글을 쓸 전기를 얻기는 하지만 언제나 꺼림직한 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수시로 잊는 건 내 머리 역시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그것에 대해 더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휴대전화야 오는 것도 받기 귀찮아 하는 처지니 자주 충전할 필요는 없었다. 노트북도 사무실에 거의 데스크탑처럼 쳐박혀 있고. 문제는 PDA. 예전에 흑백 팜을 사용할 때는 건전지를 사용하던 충전을 하던 굉장히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PPC 뿐 아니라 팜도 한번 충전하면 하루 겨우 쓸까 한다. 그만큼 예전과 달리 충전을 자주 해야 한다. 물론 휴대전화도 충전을 2, 3일에 한번은 해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 일주일 충전이란 걸 할 염두를 못내고 있다.

그 놈의 돼지코 같은 콘센트 안에는 그 놈의 에너지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PDA를 충전하기 위해 컨센트에 전원을 연결하려는데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그건 분명히 컨센트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얼까? 하며 귀를 기울이면 그건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다 거리를 두면 다시 웅웅거리는 소리 같았고. 그래서 다시 귀를 가져다 들으니 역시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덧도 한 사람의 소리가 아닌... 혹시나 해서 다른 방의 콘센트도 다 확인했다. 집 안의 모든 컨센트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 그날은 포기하고 다음날 사무실에서 충전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동생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리가 좀 나면 어떠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둔감한 동생이 부럽다. 나와는 정반대인 동생에게는 오히려 이런 것들보다는 드라마 주인공들이 헤어지는 게 더 두려운 일인 모양이다. 지금도 드라마를 보며 '어떻해, 어떻해' 하며 이불을 물어 뜯고 있다. 여하튼 그 덕분에 나는 일주일 째 충전을 못하고 있다. 내일은 동생에게라도 부탁해서 충전을 해야겠다. 그런데 콘센트 속의 그것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샴푸

예전에 잠깐 자취할 때의 이야기다.

자취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취방 혹은 자취집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필요한지 가끔 잊을 때가 있다. 그게 이제 사는데 꼭 필요한 거라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문제를 견디다 견디다 임계점에 도달하면 한꺼번에 쇼핑을 해서 해결을 하곤 한다. 물론 계획성 있게 미리 필요한 걸 준비하는 특이한 존재들도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내 근처에는 그런 녀석이 없었다. 물론 나도 그런 부류는 아니였다.

나도 항상 뭔가가 다 떨어지고 대체물까지 떨어져야 쇼핑을 하는 아주 하드코어적인 게으름뱅이이다. 물론 식사와 관련된 건 집 안에 준비된 게 거의 없이 밖에서 해결하는... 그러니 화장실에서 쓰는 물건들은 오죽 할까? 세탁 세제 같은 건 써 본 적도 없고 치약도 칫솔도 제때 마련한 적이 없어서 항상 간당간당했다. 그런데 언제나 하나만은 다시 사야할 걱정 없이 썼었다. 그건 샴푸였다. 요즘 집에서 가족이랑 쓰면 한 두 달이면 한통을 거의 다 쓴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세명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2년 가까이 자취를 하면서 샴푸를 산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입주하면서도 샴푸를 구입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거기 샴푸는 있었고 별 위화감 없이 그냥 그 샴푸를 썼다. 그리고 그후로 샴푸를 산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샴푸가 줄어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당시엔 그런 사실에 대해서 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생활 감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으니. 단지 당시에 이상하게 생각했던 다른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샴푸 통에는 항상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아마도 여자의 것이라고 생각 되는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그런 게 내 화장실에 있을 리가 없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집으로 여자를 불러 들인다거나 하는 일은 잼병에도 설혹 그렇다 해도 매일 그럴 리는 없으니... 그럼에도 단지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넘겼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간단히 생각을 멈추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쓰던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더라? 그 샴푸는 버리고 왔던가? 그 머리카락은 무엇일까? 아니 그 샴푸는 어떻게 줄어들지도 않았던 걸까? 정말 줄어들지 않았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그저 이상할 뿐이다.